본문 바로가기
영화 리뷰/별점 리뷰

Good Tastes 영화 리뷰: <자유의 언덕>

by 씨네슈 2022. 1. 10.

홍상수 자유의 언덕
홍상수, 자유의 언덕

제목: <자유의 언덕>

 

감독: 홍상수

 

개봉: 2014년

 

Good Tastes 별점: ★★★★☆

 

※본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홍상수 감독은 늘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냉소적인 자세를 유지해왔습니다. 그의 카메라는 차갑고 날카로웠습니다. 인물의 가식을 벗기고, 속을 까발렸습니다.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적나라하기도 했습니다. 예고 없이 부끄러운 속내를 드러내는 인물을 보고 있는 것은 저에게 다소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유의 언덕>은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 다릅니다. 그전의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냉소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작품입니다. 

 

뒤틀렸던 단어들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쁘다', '사랑한다' 같은 말들이 이전과 달리 단어 그대로의 뜻으로 들립니다. 이 때문일까요, 등장인물 간의 관계에도 진짜 애정이 느껴집니다. 상대를 대하는 온정적인 태도, 실수를 반성하고 고치는 인물들의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특히 카세 료가 분한 모리는 홍상수 감독의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모리가 상원과 술을 마시는 장면, 그는 자신이 백만장자라면 김의성의 빚을 모두 갚아주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김의성이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자 다시 한번 더 진지하게, "아니요, 진심으로 그러고 싶어요"라고 재차 말합니다. 

 

또 그는 욕구를 참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만약 다른 영화에서 영선 같은 인물이 접근해왔다면 백이면 백 관계를 가졌겠죠. 똑같이 북촌을 배경으로 한 <북촌방향>의 주인공 성준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쉽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 정갈하게 있다 간다고 다짐하는 그는 다가오는 모든 유혹을 받아들이는 남자였죠. 하지만 모리는 이미 사모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끝내 관계를 거부합니다. 그는 술에 취한 영선을 자신의 방에 재우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우는, 그런 사람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관계에서 희망을 잃고, 영선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도 잠을 자고 나와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습은 기존의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이 영화는 특이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모리가 권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그녀는 몸이 좋지 않아 집을 떠나 있습니다. 대신 주인공은 자신의 생활이 담긴 편지를 그녀의 집 앞에 남깁니다. 일주일 후에야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고, 편지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던 중, 편지를 놓치게 되고 편지들의 순서는 뒤섞입니다. 그 중 한장은 결국 찾지 못합니다. 편지에는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그대로 편지를 읽어 내려갑니다. 

 

영화는 그녀가 읽는 편지의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당연히 시간 순서는 뒤죽박죽입니다. 그렇다고 뭐가 먼저이고 나중인지 헷갈리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 관계를 따지고 들어가면, 순서를 맞춰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뒤바뀐 순서는 읽는 사람의 마음에 미묘한 차이를 만듭니다. 

 

관객이 보았을 때, 모리가 영선과 관계를 맺는 장면은, 전 후 사정을 살펴보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고 있는 권이 보아도 그럴까요. 그녀가 느끼는 박탈감은 상당히 컸을 것입니다. 

 

영화의 최후반부에 편지를 다 읽은 권은 모리를 만나러 오고, 둘은 일본으로 가서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는 나레이션이 등장합니다. 언뜻 보면 해피엔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어딘가 어색합니다. 갑자기 주변 인물들이 모리를 너무 영웅적으로 묘사합니다. 계속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그를 치켜올리는 부분은 이상합니다.

 

민박집 주인인 윤여정은 그에게 "역시 일본인은 친절해서 좋다"는 말을 합니다. 이 대사는 영화의 초반에도 나오는데, 이 말을 하자 모리는 쉽게 일반화하지 말라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일관성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그래서 전 이 장면이 모리의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는 꿈에 대한 상징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또 극 중 모리는 항상 잠에 들어있는 남자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을 꿈이라고 한다면, 모든 의문점들이 말끔히 해결됩니다. 홍상수는 꿈속 장면을 그릴 때 인물이 잠에 드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끝나고 이어지는 장면. 이것은 아마도 그녀가 잃어버려서 읽지 못한 남은 한 장의 편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은,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영선과의 잠자리를 거부했던 밤의 이야기. 이것을 읽었다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엇갈리고, 또 엇갈려서 결국 그와 그녀는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아마 이제 각자의 길을 갈 것입니다. 아쉽지만 우리는 이 슬프고 쓸쓸한 이야기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만약 편지를 받는다면 잃어버리지 말고, 꼭 순서대로 읽어야겠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 <인트로덕션>에 대한 리뷰

Good Tastes 선정 2021년 BEST 영화 TOP 10 리뷰 (1부)

 

Good Tastes 선정 2021년 BEST 영화 TOP 10 리뷰 (1부)

2021년은 좋은 영화들이 쏟아져 나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행복한 1년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스럽다고 해도 영화만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

goodtastes.tistory.com

댓글